강화에는 성공회 성당이 두 곳 있다.
강화읍내의 성당과 온수리 성당이 그곳들...
성공회 강화 성당이 영국인들에 의해 많은 재정으로 지어진 거에 비해
성공회 온수리 성당은 주민들의 기부와 참여로 지어졌다.
오늘 소개할 곳은 강화 온수리 성공회성당~
강화 온수리 성공회 사제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
우리나라에 성공회가 처음으로 전파되기 시작할 때,
초대 선교사 고요한(Corfe C. J.) 주교와 함께
영국으로부터 내한한 조마가(Mark N. Trollope) 신부가
1896년 강화에 부임하여 선교를 하면서
2년 후인 1898년에 건축한 건물이다.
이후 사제관이 퇴락하자
1933년 원형 그대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사제관은 영국 성공회가 선교를 시작하면서
영국인 신부가 한국전통 주거문화 속에 어떻게 적응하고 왔는가를
짐작하게 할 수 있는 주거공간으로,
또 건축수법이나 치목형식에서 완전히 한국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국인들의 주문을 어떤 방식으로 소화하여
기술적인 적용을 하였는가를 드러내는 건축이라 할 수 있다.
건물 형식은 'ㄷ'자형 연와구조로 된 5량 4간의 홑집이다.
(문화재청 자료)
강화 온수리 성공회성당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2호.
이 교회는 1906년 영국인 주교 조마가(Mark N. Trollope)가 지은 성당 건물로
우리나라의 초기 서양 기독교 교회양식의 건물이다.
성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중앙 1칸을 2층 종루로 삼은 문루와
정면 9칸 측면 3칸의 본당으로 이루어진 건물인데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기법을 활용하여
종교적인 성당건축 방법과 공간 구성을 확립한
동서 절충식 강당형의 목조건물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고,
용마루 양끝에는 연꽃 모양으로 된 곡선미를 살린 돌십자가가 달려 있다.
(출처: 문화재청)
강화 온수리 성공회성당
1906년 영국인 주교 조마가(트롤로프, Mark N. Trollope)가 지은 성당 건물로
우리나라의 초기 서양 기독교 교회양식의 건물이다.
성공회 강화성당(1900년)에 이어 두 번째로 강화에 건립된 성공회 성당.
온수리 성당의 본명은 성 안드레 성당(정면 입구에 쓰여짐).
박공에는 연꽃 문양의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이렇게 한옥 모양의 성당을 건립한 것은
우리나라 기와집 형태로 건립해서
당시 주민들의 거부감을 줄이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전시관으로 쓰이는 곳~
온수리 성공회성당의 옛 흔적들을 대하고 밖으로 나온다.
강화 온수리 성공회성당 신 성당 (성 베드로 성당)
온수리 성베드로성당을 돌아본다.
온수리 성안드레성당은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고,
성베드로성당이 현재 예배를 보는 성당이다.
강화 온수리 성공회성당 신 성당 (성 베드로 성당)
신부님께서는 코로나 때문에 성당 문을 열지 않고 있다시면서
그래도 멀리까지 왔으니 보여주시겠단다.
온수리 성베드로성당은 이곳 성공회 신자(광산 김씨 김갑수 요나 부부)님이
온수리 전답 2,000평을 기증한 대지 위에 지어졌다고 한다.
성당 출입문 옆 정초석 오른쪽에 이분들을 기리는 봉헌명판을 새겨 놓았다.
성당이 세워지고 성당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으니
마을의 행사나 큰 일에는 성당의 잔디마당을 내어주기도 한단다.
성당 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예수상이 보이는데,
색유리공예 모자이크로 만들어진 그림이라고 하며
발 아래는 강화도, 위에는 정족산을 표현하여
강화에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나타냈단다.
새 성당(온수리 성 베드로 성당) 내부에도 12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양쪽 벽에는 십자가의 길(14처) 그림이 걸려 있고,
벽 양쪽 옆 위와 천장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베드로가 성전(이 성당)을 들고 있는 모습(축성),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가 그물을 던지는 모습,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는 장면,
산딸나무(십자가 모양 꽃)와 모란꽃 장식 등이 표현되어 있다.
온수리 성베드로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14처 그림 등은 모두
홍익대 미대 출신이자 회화과 교수를 지낸 김용철 화가님의 작품이란다.
이분의 고향이 이곳으로 성당 땅을 기부하신 분이 7촌 아저씨라네.
현재 온수리성당에 등록된 신자의 수가 350명 정도이고,
평소 200명 정도의 신자분이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물론 코로나 이전 기준)
시골 면소재지 치고는 신자 수가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
어려운 시절에 강화에 성공회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노력한 분들이 있었고,
이후 평신도들의 기부와 헌신, 교회에 대한 애정 등으로 인해
온수리 성공회성당이 지금까지도 잘 유지되나 보다.
코로나 상황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마다하지 않고
온수리 성당의 이모저모에 대해 설명을 해주신 신부님께 감사드린다.
서양화 전공인 김용철 화가는
온수리 성베드로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설치를 위해
프랑스 낭시에서 유리공예를 배우는 제자를 찾아가
스테인드글라스의 기초부터 배우고 익혔다고 한다.
우리 전통 문양을 통해 이 시대의 교회 미술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말처럼
온수리 성베드로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한국적인 미를 접목한 작품이다.
산딸나무 꽃잎과 모란꽃 등은 사찰의 문살을 보는 듯하다.
성공회가 강화에 선교를 시작한 것은 1893년 7월,
워너 신부가 강화읍 갑곶이에서 고아, 거지들을 돌보며 교리와 신앙을 심었다.
1897년에 로스가 강화 온수리에 진료소(약국)를 설치하고
온수리와 강화읍을 왕래하면서 진료사업과 선교사업을 펼쳤으며
1900년에 온수리로 들어와 진료와 전도사업에 힘썼다.
그러자 환자들이 스스럼없이 진료를 받으러 오게 되었고,
그분들 대부분이 신자가 됐다고 한다.
먼 이국땅에 와서 성심껏 노력한 선교사분들이 있어
선교의 뿌리 내리기가 가능했던 듯...
이후 교세의 성장으로 새 성당을 짓게 되는데,
평신도들이 땅을 기증하고 특별 헌금을 내어서 짓게 된다.
온수리 성당(성안드레성당)이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평신도들에 의해 지어졌다는 것이 아닐까~~~
현 예배당인 성베드로성당 건축 역시
신도들의 땅 기부, 헌금, 재능 기부 등이 이어져서 가능했으니
처음 강화에 뿌리를 내린 성공회 선교사분들의 뜻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2021.1.6.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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