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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서울 인천 경기

[인천 강화] 강화 온수리 성공회성당, 강화 온수리 성공회사제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2호 강화 온수리 성공회성당 (성 안드레 성당)
강화 온수리 성공회성당 (가운데가 본채 예배당, 왼쪽 옆 뒤로는 새 봉헌 성당인 성 베드로 성당, 오른쪽은 종탑 문루)

 

 

강화에는 성공회 성당이 두 곳 있다.

강화읍내의 성당과 온수리 성당이 그곳들...

성공회 강화 성당이 영국인들에 의해 많은 재정으로 지어진 거에 비해

성공회 온수리 성당은 주민들의 기부와 참여로 지어졌다.

오늘 소개할 곳은 강화 온수리 성공회성당~

강화 온수리 성공회성당 입구
강화의 숨겨진 사진 명소라고 쓰여 있네...
온수리 성공회성당 (문화재청 자료) - 가운데 앞쪽이 종탑 문루, 성안드레성당(한옥 성당), 성베드로성당(새 성당) / 오른쪽 가린 부분이 사제관.

 

강화 온수리 성공회 사제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

우리나라에 성공회가 처음으로 전파되기 시작할 때,

초대 선교사 고요한(Corfe C. J.) 주교와 함께

영국으로부터 내한한 조마가(Mark N. Trollope) 신부가

1896년 강화에 부임하여 선교를 하면서

2년 후인 1898년에 건축한 건물이다.

이후 사제관이 퇴락하자

1933년 원형 그대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사제관은 영국 성공회가 선교를 시작하면서

영국인 신부가 한국전통 주거문화 속에 어떻게 적응하고 왔는가를

짐작하게 할 수 있는 주거공간으로,

또 건축수법이나 치목형식에서 완전히 한국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국인들의 주문을 어떤 방식으로 소화하여

기술적인 적용을 하였는가를 드러내는 건축이라 할 수 있다.

건물 형식은 'ㄷ'자형 연와구조로 된 5량 4간의 홑집이다.

(문화재청 자료)

종탑 아래 오른쪽의 강화 온수리 성공회사제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 1898년에 건축. 1933년 원형 그대로 중수
강화 온수리 성공회사제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 뒷문쪽

 

강화 온수리 성공회성당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2호.

이 교회는 1906년 영국인 주교 조마가(Mark N. Trollope)가 지은 성당 건물로

우리나라의 초기 서양 기독교 교회양식의 건물이다.

성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중앙 1칸을 2층 종루로 삼은 문루와

정면 9칸 측면 3칸의 본당으로 이루어진 건물인데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기법을 활용하여

종교적인 성당건축 방법과 공간 구성을 확립한

동서 절충식 강당형의 목조건물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고,

용마루 양끝에는 연꽃 모양으로 된 곡선미를 살린 돌십자가가 달려 있다.

(출처: 문화재청)

원래 이 문이 성당의 출입문. 솟을삼문 형태의 종루 아래에 아저씨 한 분이 종을 치려고 기다리신다. (하루에 세 번 종-아침 6시, 낮12시, 저녁 6시) 
온수리 성당 문루의 종
문루 종탑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터너(왼쪽, 가운데)와 조마가(오른쪽) 신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김여수 마태 독립운동순국비와 묘
조광원 노아신부 독립운동기념비

종탑 문루와 성당 옆모습
종탑 문루와 성당 후면. 박공에 연꽃 문양의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성당 후면과 측면. 지붕에 돌십자가가 달려 있네...
성당 측면
강화 온수리 성공회성당 정면 (성 안드레 성당이라고 쓰여 있다.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아에게 바쳐진 성당). 현재 전시실로 쓰이고 있다.

강화 온수리 성공회성당

 

1906년 영국인 주교 조마가(트롤로프, Mark N. Trollope)가 지은 성당 건물로

우리나라의 초기 서양 기독교 교회양식의 건물이다.

성공회 강화성당(1900년)에 이어 두 번째로 강화에 건립된 성공회 성당.

온수리 성당의 본명은 성 안드레 성당(정면 입구에 쓰여짐).
박공에는 연꽃 문양의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이렇게 한옥 모양의 성당을 건립한 것은 

우리나라 기와집 형태로 건립해서

당시 주민들의 거부감을 줄이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문을 열고 바라봄 (전실 벽에 이곳에서 집무하던 관할 사제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전실(신발 벗고 들어서서 왼쪽) 위에는 이곳에서 집무하던 관할 사제들의 사진...

 

전실(신발 벗고 들어서서 오른쪽). 위에는 이곳에서 집무하던 관할 사제들의 사진...
강화 온수리 성공회성당 내부. 가운데에 주교좌 의자가 있고, 양쪽으로 사제복 외 유물들과 사진들이 벽을 따라 전시되고 있다.
성당은 기둥을 통해 3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진다. 가운데를 기준으로 양쪽 12개의 기둥(예수의 12 제자를 상징).
유리 속 전시물은 주교좌
주교좌 (주교의 자리) - 주교 순방시 사용했다는 영국산 주교좌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영상 자료가 나오고 있다.
그 옆으로 성당의 역사와 함께하는 자료들~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성당의 역사를 말해주는 서적들~
그 옆으로 성당의 역사와 함께하는 자료들~
목재로 지었지만 아주 튼튼한 구조로 지어진 듯... 제대 앞 목재 기둥 사이 위쪽으로 십자가의 예수상이 걸려 있다.
튼튼한 천장 구조
제일 안쪽의 제대. 성(聖)자가 세 개 새겨져 있다.

제대 뒤 후실
제대 뒤 후실

제단 앞에서 정면 입구쪽을 바라봄. 옛 난로(목탄난로)도 놓여 있네...
제단 앞에서 왼쪽 벽면을 바라봄. 벽에는 사진 자료들이 걸려 있다. 오르간도 보인다.
제단 앞에서 왼쪽을 바라봄. 원래 성공회의 예배 의자는 한사람씩 따로 앉는 단독의자. 긴 의자는 요즘 개신교에서 나온 방식이라네...
제단 앞에서 오른쪽 벽면을 바라봄. 오래 된 풍금과 독서대. 
제단 앞에서 정면 입구쪽을 바라봄. 옛날 의자가 앞줄에 몇 개 놓여 있다.

지금은 전시관으로 쓰이는 곳~

온수리 성공회성당의 옛 흔적들을 대하고 밖으로 나온다.

 

 

강화 온수리 성공회성당 신 성당 (성 베드로 성당)

온수리 성베드로성당을 돌아본다.

온수리 성안드레성당은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고,

성베드로성당이 현재 예배를 보는 성당이다.

부속 건물. 공부방 겸 지역 아동 센터. 뒤로는 놓이터
수령 150년 된 큰 소나무 두 그루 중 한 그루. 성전 건축 설계 시 이 소나무를 살리고자 위치를 변경했단다. 
현재 예배를 보고 있는 새 성당 (성 베드로 성당). 문이 닫혀 있다.
2004년 축성
이 두 분이 이 성전 건축을 위해 전답 2,000평을 봉헌했단다.
신 성당(성 베드로 성당)에서 내려다본 온수리 성당. 뒤로 보이는 산이 정족산(삼랑성과 전등사가 있는~)
현재 예배를 보는 성 베드로 성당. 가운데로도 큰 소나무 한 그루
코로나 때문에 문을 열어 놓지 않아서 바깥 모습을 일단 돌아본다.
1층으로 통하는 문 앞에도 수령 150년 된 큰 소나무 한 그루
아기 예수의 탄생 장면
외부를 돌아 1층 입구로 가서 문을 열어 보니 신부님이 보이신다. 새 성당을 좀 볼 수 없겠느냐고 하니 선뜻 들어오라고 하신다.

강화 온수리 성공회성당 신 성당 (성 베드로 성당)

 

신부님께서는 코로나 때문에 성당 문을 열지 않고 있다시면서

그래도 멀리까지 왔으니 보여주시겠단다.

 

온수리 성베드로성당은 이곳 성공회 신자(광산 김씨 김갑수 요나 부부)님이

온수리 전답 2,000평을 기증한 대지 위에 지어졌다고 한다.

성당 출입문 옆 정초석 오른쪽에 이분들을 기리는 봉헌명판을 새겨 놓았다.

성당이 세워지고 성당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으니

마을의 행사나 큰 일에는 성당의 잔디마당을 내어주기도 한단다.

성당 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예수상이 보이는데,

색유리공예 모자이크로 만들어진 그림이라고 하며

발 아래는 강화도, 위에는 정족산을 표현하여

강화에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나타냈단다.

새 성당(온수리 성 베드로 성당) 내부에도 12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양쪽 벽에는 십자가의 길(14처) 그림이 걸려 있고,

벽 양쪽 옆 위와 천장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베드로가 성전(이 성당)을 들고 있는 모습(축성),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가 그물을 던지는 모습,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는 장면,

산딸나무(십자가 모양 꽃)와 모란꽃 장식 등이 표현되어 있다.

온수리 성베드로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14처 그림 등은 모두

홍익대 미대 출신이자 회화과 교수를 지낸 김용철 화가님의 작품이란다.

이분의 고향이 이곳으로 성당 땅을 기부하신 분이 7촌 아저씨라네. 

현재 온수리성당에 등록된 신자의 수가 350명 정도이고,

평소 200명 정도의 신자분이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물론 코로나 이전 기준)

시골 면소재지 치고는 신자 수가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

어려운 시절에 강화에 성공회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노력한 분들이 있었고,

이후 평신도들의 기부와 헌신, 교회에 대한 애정 등으로 인해

온수리 성공회성당이 지금까지도 잘 유지되나 보다.

 

코로나 상황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마다하지 않고

온수리 성당의 이모저모에 대해 설명을 해주신 신부님께 감사드린다.

 

2004년 축성한 온수리성당 새 성당 (성 베드로 성당). 오른쪽 위 스테인드글라스에 베드로가 이 성당을 들고 있는 모습 나타냄.
온수리 성 베드로 성당
정면 가장 끝부분의 스테인드글라스 (십자가탑 아래)
정면 가장 끝부분 지붕의 스테인드글라스 (십자가탑 아래)
색유리공예 모자이크 성화. 예수님의 발 아래는 강화도, 머리 위에는 정족산을 표현했단다. (2004년)

시몬(베드로)과 안드래아(안드레) 형제가 그물 던지는 모습과 예수
2004년 성베드로성당 봉헌 

 

서양화 전공인 김용철 화가는

온수리 성베드로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설치를 위해

프랑스 낭시에서 유리공예를 배우는 제자를 찾아가

스테인드글라스의 기초부터 배우고 익혔다고 한다. 

우리 전통 문양을 통해 이 시대의 교회 미술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말처럼

온수리 성베드로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한국적인 미를 접목한 작품이다.

산딸나무 꽃잎과 모란꽃 등은 사찰의 문살을 보는 듯하다.

산딸나무 꽃잎과 모란꽃 문양 - 십자가 모양
거꾸로 매달려 순국하는 베드로의 모습
벽면의 14처 중 일부
벽면의 14처 중 일부

 

후면 가장 끝부분 지붕 아래의 스테인드글라스 -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
후면 (가운데 끝 둥근창이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 오른쪽 벽 끝에서 두 번째가 베드로의 순국 장면)

 

성공회가 강화에 선교를 시작한 것은 1893년 7월,

워너 신부가 강화읍 갑곶이에서 고아, 거지들을 돌보며 교리와 신앙을 심었다.

1897년에 로스가 강화 온수리에 진료소(약국)를 설치하고

온수리와 강화읍을 왕래하면서 진료사업과 선교사업을 펼쳤으며
1900년에 온수리로 들어와 진료와 전도사업에 힘썼다.

그러자 환자들이 스스럼없이 진료를 받으러 오게 되었고,

그분들 대부분이 신자가 됐다고 한다.

먼 이국땅에 와서 성심껏 노력한 선교사분들이 있어

선교의 뿌리 내리기가 가능했던 듯...

이후 교세의 성장으로 새 성당을 짓게 되는데,

평신도들이 땅을 기증하고 특별 헌금을 내어서 짓게 된다.

온수리 성당(성안드레성당)이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평신도들에 의해 지어졌다는 것이 아닐까~~~

현 예배당인 성베드로성당 건축 역시

신도들의 땅 기부, 헌금, 재능 기부 등이 이어져서 가능했으니

처음 강화에 뿌리를 내린 성공회 선교사분들의 뜻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2021.1.6.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