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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대전 충청

[충남 보령] 토정비결의 저자인 이지함을 모신 화암서원 (化巖書院)

[충남 보령] 토정비결의 저자인 이지함을 모신 화암서원 (化巖書院)

 

2016.11.26~27 보령 여행

* 제 1일 : 김좌진장군묘-청소역-신경섭고택-화암서원-남포벼루

(해물칼국수)-남포읍성-남포향교-상화원-대천해수욕장-(갈치조림)

* 제 2일 : (할매국밥)-대천해수욕장-대천항-토정 이지함 묘

-도미부인 사당(정절사)-충청수영 해안경관전망대-선림사

-(손칼국수)-충청수영성-보령읍성-보령리 오층석탑-보령향교






 

길을 가다 만난 어느 시골 학교... 

상록수는 푸르른데,

활엽수들은 입을 떨어뜨린 모습...

지난해 늦가을의 모습이다.

(2016. 11.26. 토)


청천저수지


 

 청천저수지 인근에 위치한 화암서원.

바로 길가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하기는 쉽다.

 

계절을 거슬러 핀 명자나무꽃이 반갑고...



 

사철나무 열매도 사랑스러워 보인다.


입구의 화단에는 각양각색의 국화가 피어서 객을 반긴다.

현재 화암서원을 지키시는 할머니 덕분이다.


 

할머니께서 가꾸신 고운 국화


 

화암서원 (化巖書院)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38호


◦ 화암서원은 1610년(광해군2)에

충청관찰사 정엽(鄭曄)과 이지함의 문인인 구계우(具繼禹)가

주도하여 건립하였으며,

1686년(숙종12)에 화암서원으로 사액(賜額)되었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 철폐되었다가

1922년 다시 복설되었고,

청천저수지 축조로 1959년에 현 위치로 옮겨 세워졌음.

◦ 처음에는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菡)과 명곡 이산보(鳴谷 李山甫)를 모셨고,

이어서 1723년에는 천휴당 이몽규(天休堂 李夢奎),

고종조에는 퇴우당 이정암(退優堂 李廷馣),

1971년에는 수암 구계우 등 5분의 위패를 모셨음.

◦ 1988년에는 이지함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지역 유림들이 매년 춘추로 제향하고 있음.

◦ 서원의 구조는 2단으로 된 터의 앞에는 동재, 서재, 강당, 관리사 등이 있고,

뒤에는 사당이 있는 전학후묘식(前學後廟式) 구조임.

(출처 : 문화재청)

 

 화암서원 입구


삼문의 양쪽 문을 열어 놓아서 불편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문을 들어서면 동재와 서재가 바로 보이는데,

공간도 좁고 아주 작은 규모이다.


서재 공간은 할머니께서 거처하는 곳으로 쓰이고 있다.


위쪽에 사당이 위치하고 있고

왼쪽으로 돌아가면 강당이 있다.



화암서원은 1610년(광해군2)에 건립,

1686년(숙종12)에 화암서원으로 사액(賜額)되었음.

1868년(고종5)에 철폐.

1922년 복설,

청천저수지 축조로 1959년에 현 위치로 옮겨 세워졌음.


사당(숭덕사)


처음에는 토정 이지함과 명곡 이산보를 모셨고,

이어서 1723년에는 천휴당 이몽규,

고종조에는 퇴우당 이정암,

1971년에는 수암 구계우를 모셔

현재 5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1988년에 이지함 선생의 영정을 봉안,


이지함(李之菡)

조선 중기의 학자로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1517(중종 12) ~1578(선조 11)

본관은 한산(현 서천), 호는 토정, 수산.

목은 이색의 7세손.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형인 지번(之蕃) 밑에서 글을 배웠다.

후에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생이 되어 영향을 받았으며

수리·의학·복서(卜筮)·천문·지리·음양·술서 등에 달통하게 된다.

1573년(선조 6) 주민의 추천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청하(淸河:지금의 포천)현감이 되었고,

재직 중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알아서 많은 생명을 구제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으나

1578년 아산현감으로 다시 등용되었고,

부임한 즉시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일정한 정착지가 없는 걸인들을 구제하였으며,

노약자와 기인(飢人:굶주린 사람)을 구호하였다.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냈으며,

그 때문에 ‘토정’이라는 호가 붙게 되었다.

토정이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를 찾아오는 사람의 숫자가 많아지고

일 년의 신수를 보아 달라는 요구가 심해짐에 따라 책을 지었는데,

그것이 『토정비결』이라고 알려져 있다.

전국의 산천을 두루 다니며 명당과 길지를 점지하였으며,

『농아집(聾啞集)』을 저술하여 어진 자에게 전하여

난을 구제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당대 성리학의 대가 조식(曺植)이 마포로 찾아와

그를 도연명(陶淵明)에 비유하였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출처: 다음백과, 한국사 인물 열전 참조)



사당 공간

서원 중에서도 아주 간소한 규모이다.


청천저수지가 내려다보인다.


사당 앞 계단에서 바라본 풍경

가운데로 삼문, 양쪽으로 동서재가 자리하고 있다..


할머니의 거처인 서재 뒤편으로 돌아가면 강당이 자리잡고 있다.


겨울 채비를 해 둔 것일까~~~


강당 공간.

관리 할머니의 거처로 쓰이고 있는 서재 뒤편.

이렇게라도 지키시는 분이 있으니

서원이 관리되고 있음이라~~~


토정은 가고 없어도 아직도 해가 바뀔 때면

한 해 신수를 보는 사람들이 있으니

토정이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고 할 수 있겠다. 


(2016.11.26.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