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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광주 전라

[전북 무주] 무주 구천동 33경 중 몇 곳을 찾아서...(수심대, 파회, 나제통문~)

[전북 무주] 무주 구천동 33경 중 몇 곳을 찾아서...

(수심대, 파회, 나제통문~)

 

< 무주 여행 >


<제1일, 2016.02.20>

 무주 머루와인동굴(터널) - 무주 양수 홍보관 -

점심(무주리조트 아래 동네 '생두부촌') 덕유산 향적봉

- 무주 구천동 33경 중 몇 곳(수심대, 파회, 나제통문~)

- 저녁(무주읍 인근 '천지가든') - 무주읍 숙소


<제2일, 2016.02.21> 

아침(샌드위치와 커피) - 남대천교 - 반딧불장터

- 지남공원(한풍루)과 반딧골 전통공예문화촌 - 무주향교

- 지전마을 돌담길 - 반디랜드 - 태권도원과 전망대



덕유산 향적봉을 오르내린 후

무주 구천동 33경 중 몇 곳을 들르며

무주읍내로 향하였다.

1경~12경이 가는 길에 있어 드라이브 길에 들르게 된다.


무주 구천동 33경은

제1경 나제통문, 제2경 은구암, 제3경 청금대, 제4경 와룡담,  제5경 학소대,

제6경 일사대, 제7경 함벽소, 제8경 가의암, 제9경 추월담, 제10경 만조탄,

제11경 파회, 제12경 수심대,  제13경 세심대, 제14경 수경대, 제15경 월하탄,

제16경 인월담,  제17경 사자담, 제18경 청류동, 제19경 비파담, 제20경 다연대,
제21경 구월담, 제22경 금포탄, 제23경 호탄암, 제24경 청류계, 제25경 안심대,

제26경 신양담, 제27경 명경담, 제28경 구천폭포, 제29경 백련담, 제30경 연화폭,

제31경 이속대, 제32경 백련사, 제33경 향적봉을 말한다.



구천동 제12경 수심대

먼저 12경 수심대를 만났다.

이곳에는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잠시 차에서 내려 감상...



신라 시대 일지대사가 이곳에서 흐르는 맑은 물을 보고

깨우친바 있다 하여 수심대라 했다고 한다.



계곡에 놓인 다리를 바라보며...



다리를 건너려니 삐걱거리기도 해서 좀 불안했다...



수심대는 옥같이 맑은 물이 굽이굽이 돌고돌아 흐른다 하여

수회(水回)라고 부르기도 하며

병풍처럼 둘러친 절벽산이 마치 금강산 같다 하여 

  소금강이라고도 부른단다.


<수심대>

전북 무주군 설천면 대평길 16

(설천면 심곡리 1311)




구천동 제11경 파회

구천동 3대 명소 중 하나라는 파회.
        고요히 잠긴 소에서 급류가 암석에 부딪치며

다시 소가 되는 멋진 경관을 보여주는 곳...



수심대 바로 가까이에 위치



청아한 물소리에 절로 눈길이 간다.

물빛 또한 어찌 그리 맑고 투명한지...



흐르는 물소리, 투명한 물빛에 넋을 잃고 보게 된다.


다시 길을 떠난다.

구비구비 이어지는 계곡~

구천동의 비경들을 더러는 지나치기도 하고....




전라북도 기념물 제80호 서벽정

서벽정은 구한말의 학자 송병선이 이곳에 은거하여 지은 정자로

구천동 제6경 일사대(수성대)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송병선이 선비들과 나라 일을 논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곳...

한국전쟁 때에는 북한군이 머물기도 하였단다.


송병선은 송시열의 9세손으로

조선 말기의 순국지사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단식으로 충을 실행했으며,

왕에게 소를 올리려다 고향인 대전 석남촌에 강제 이송되었다.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세태를 비관하며 은둔생활을 할 때

이곳의 수려한 산수에 반해 지은 정자가 서벽정이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80호 서벽정.

송병선은 주위의 선경에 취하여 시름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을까~~~


<서벽정>   

063-324-2114          

전북 무주군 설천면 구천동로 1868

(설천면 두길리 2109)




구천 제6경 일사대(수성대)

구천동 3대 경승지 중 하나란다.



일사대는 서벽정 서쪽에 우뚝 솟은 기암이 

  배의 돛대 모양을 한 절경으로
구한말의 학자 송병선이 이곳에 은거하여 서벽정을 지어

호를 동방일사(東方一士)라 하고

푸른 바위의 깨끗하고 의젓함을 들어

일사대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주변의 다리는 통제 중이었다.


서벽정 아래에 민가가 한 채 있는데,

그 옆으로 난 작은 계단길을 따라 내려가 보았다.

계곡길을 따라 가 보았지만

일사대는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구천제5경 학소대

서벽정 동쪽 계곡에 학이 둥지를 틀고 살던 노송이 있던 명소라는데,

역시 시간 부족으로 내려가 보지는 못하였다.



구천제4경 와룡담

일사대를 위어 감고 흐르는 물이

마치 누워 있는 용같이 생긴 바위 주변을 맴돌며

담을 이루는 곳...

여기서 400m 정도 걸으면 나온다.

시간만 넉넉하다면 모두 돌아볼 절경들이다.



구천동 제1경 나제통문(라제통문)

나제통문 입구 삼거리의 정자, 덕유정



나제통문 입구 삼거리 휴게소 앞에

구천동 33경 탐방안내도가 보여서 찍고...



설천교와 나제통문



나제통문에 대한 설명도 읽어 보고...



나제통문...

와 백에서 한 글자씩 따와서 이름지어진 통문이다.

 

나제통문은 설천면에서 무풍면으로 가는 도중의

설천면 두길리 신두(新斗)마을과 소천리 이남(伊南)마을 사이를 가로질러

암벽을 뚫은 통문이다.

통일문으로도 불린다.

무주 설천은 옛날 신라와 백제의 경계에 위치하여

두 나라가 국경 병참 기지로 삼아
한반도 남부의 동서문화가 교류되던 관문이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풍속과 문물이 판이한 지역이었던 만큼

지금도 언어와 풍습 등 특색을 간직하고 있어

설천장날에 가보면 사투리만으로 무주와 무풍 사람을 가려낼 수 있다.

(무주군청 문화관광 자료)



설천면 두길리 신두(新斗)마을쪽에서 본 나제통문


나제통문은

높이 3m, 길이 10m의 자연암석을 인위적으로 관통시킨 동굴로서,

설천면과 무풍면의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실제로는 여기서 조금 더 가야 무풍면)

 덕유산국립공원 경역 안에 속하며 무주구천동의 입구에 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도 윗부분에 ‘羅濟通門’이라는 글자가 남아 있다.



설천면은 무주읍에서 구천동으로 가는 길목으로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 양국의 경계였다고 한다.

지금도 동굴 양쪽에 위치한 자연부락인

무풍 방면의 이남(伊南)과 무주 방면의 새말(新村)은

1㎞ 정도 떨어져서 행정구역으로 모두 소천리에 속하지만

언어와 풍속이 서로 다르고 통혼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각기 풍속과 전통이 판이하게 유지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신라와 백제의 접경 지역이었다는 이곳...


이 지역에는 삼국시대와 관계된 유적이나 전설이 많다.

부근의 야산에 산재한 약 3백여 기의 고분은

신라와 백제간에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며,

파리소(沼)라는 연못은 양국의 격전시에

시체가 산처럼 쌓여 파리가 모여들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통문은 삼국통일전쟁시에 신라의 장군 김유신이 왕래했다고 하여

‘통일문’이라고도 불린다.

인근의 무산성지 근방 사선암이라는 크고 평평한 바위는

김유신 등 4명의 화랑이 바둑을 두며 놀던 장소라고 전해지며,

지금도 바위에 바둑판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전설의 사실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이 지역이 신라·백제 양국의 전쟁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점이다.



나제통눈문옆 벽에 잔뜩 새겨진 이름들...

누가 새겼는지~ 무슨 일로 새겼는지~



이런 것도 새겨져 있는데,

어쨌든 경자년에 설치한 모양이다.

경자년이라면 1900, 1960년?



설천면 이남리쪽을 바라보며 통과해 본다.

이 통문을 경계로 언어와 풍속이 서로 다르다고 하는데, 

현재는 나제통문 양쪽이 모두 설천면에 속한다.


무주라는 지명은

조선 태종 때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옛 신라땅의 풍과 백제땅 계를 합병하여 생겨났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무주(전라북도)와 김천(경상북도)의 경계는

여기서 30번 국도를 따라 약 15㎞ 정도를 가야 한다.

 

오래전 김천쪽에서 이곳 무주로 넘어올 때

이 나제통문을 이용한 적이 있다.



통문을 통과해서 소천리 이남(伊南)마을쪽에서 바라본 나제통문.


신라·백제 양국은 5세기 이전에는

주로 조령·죽령 방면과 추풍령 방면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 뒤 가야 제국이 신라에 흡수되어

소백산맥을 경계로 백제와 맞대게 되면서부터

양국은 육십령(六十嶺)을 넘나들며 전투를 벌였다.

통문은 육십령 부근에 위치하고 있어

실제로 신라군과 백제군이 자주 내왕했을 것이고,

『삼국사기』에 김유신이 백제의 장군 의직

무산성(지금의 전라북도 무주)에서 싸웠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김유신에 관한 전설도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남마을쪽 통문 옆에 서 있는 열녀



이남리쪽에서 바라본 나제통문

실제로는 이 통문이 언제 뚫렸는지 자세히는 모른다고 하는데,

이남마을 동네 어느 어른의 얘기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에 도로 건설을 위해 뚫었다는...

정확한 사실이야 어떻든 이 통문을 경계로

말씨나 풍습이 달랐다고 하니 참 신기하기만 하다.


통문은 삼국시대가 아닌 후대에

통문의 역사적 의미가 전해져 내려오다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혹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료 인용)



이남리쪽에서 다시 두길리쪽으로 통과하는 중~



이남리쪽에서 다시 두길리쪽으로 통과하는 중~

나제통문은 몇 번이나 보았지만

이 지역을 지날 때면 꼭 들르게 된다.

다음에는 주변의 다른 곳들도 돌아보고 싶다.



원당천.

나제통문 휴게소 건물에 불이 들어온 걸 보니

저녁이 되었나 보다.



원당천



나제통문 앞에서 본 원당천



나제통문 앞에서 바라본

나제통문 휴게소(左)와 덕유정(右)이 보이는 풍경...


주위는 많이 어두워졌고~

읍내를 향한 우리의 발걸음도 빨라지게 된다.


2016.02.20(토)


<나제통문>

전북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 1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