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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서울 인천 경기

[경기 남양주] 순종황제와 두 황후가 잠든 곳, 유릉

[경기 남양주] 순종황제와 두 황후가 잠든 곳, 유릉

 

유릉은 순종과 비 순명효왕후, 계비 순정효황후의 무덤이다.

조선왕조 무덤 중 한 봉우리에 3개의 방을 만든 동봉삼실릉은 유릉 뿐이다.

12면의 면석에 꽃무늬를 새긴 병풍석과 12칸의 난간석을 세웠다.

무덤 아래에는 침전이 정자각을 대신하였으며

그 아래 문·무인석, 기린, 코끼리, 사자상 등을 배치하였다.

홍릉과 유릉은 철종 이전의 무덤과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종을 황제로 칭하게 됨으로 제릉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기 위해서

석물의 규모나 종류가 달라졌으며,

임금의 침실, 제사지내는 방의 위치가 달라졌다.

2개의 무덤을 하나로 묶기 위해 외곽으로 담장을 설치하였으며,

양릉 중간에 돌로 만든 연못을 두었다.

(출처 : 문화재청) 

 

홍살문을 들어서면 안쪽으로 참도가 보이고,

참도의 양쪽으로 석물이 보이고,

참도의 끝에 침전이 보인다.

 

 

사진 앞쪽의 네모진 곳 가운데에 구멍이 있는데, 천막을 칠 때 쓰는 막대를 꽂는 곳이라고 한다.

 

 

 

사진 앞쪽은 천막을 치는 고리대

 

유릉의 석물은 홍릉에 비해 짜임새가 있어 보인다.

왼쪽이 배위.

 

일제가 자기네의 우수성을 부각시키며 우리 민족을 달래려는 속셈을 가지고 신경을 써서 만들었기 때문.

석상의 형태도 홍릉의 석물은 다리 부분이 막혀 있지만 이곳 유릉의 석물은 동물의 형태를 그대로 보여준다.

 

문석인은 사실적인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홍릉의 문석인과 같이 머리에 관을 쓰고 있다. 

 

 

 

침전에서 홍살문과 재실쪽을 바라보며...

 

침전 뒤로 가서 능침을 보려 했으나 보이지 않았다.

 

사진 앞쪽 부분은 혼령이 드나드는 다리

 

망료위. 축문을 태우는 곳...

 

전체 석물의 조각이 홍릉의 것보다 사실적이면서 뛰어난 수법을 보인다. 

 

 

 

그동안 보아왔던 왕릉의 배위와는 달리 홍살문을 들어서서 왼쪽에 배치되었다.

 

   

홍릉과 같은 황제릉 양식으로 조성하여 정자각 대신 침전이 자리하고,

기린, 낙타, 코끼리 등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다양한 형태의 석물이 있다.

홍릉에 비해 능역 규모가 다소 좁은 편이긴 하지만,

전체 석물의 조각은 홍릉의 것보다 사실적이면서 뛰어난 수법을 보인다.

 

 

 

 

어재실 

 

 

 

 

 

어재실에서 바라보면 유릉의 봉분이 보인다.

유릉의 능침 주변에는 화문을 새긴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져 있고,

가운데에는 혼유석과 사각 장명등이,

양 옆에는 망주석이 세워져 있다.  

 

어재실에서 바라본 유릉.

겉으로 보기엔 봉분이 하나여서 단릉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 순종과 그의 두 왕비가 잠들어 있다.

조선 왕릉 중 한 능침에 세 명의 수장자를 합장한 유일한 동봉삼실형이다.

 

어재실 

 

 

 

 

 

어정(御井).

홍살문과 침전의 바깥 공간에는 남아 있는 우물터

 

 

유릉(裕陵) 이야기

 

순종은 조선 왕조 제27대 왕이며, 대한제국 제2대 황제이다.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고종의 유일한 적자이자 장자이다.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함께 황제 자리에 올랐으며 재위 기간은 4년.

1910년 한일강제합병을 맞게 되었다.

 

순종의 원비인 순명효황후는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1904년(광무 8) 11월 5일 경운궁에서 세자빈의 신분으로 춘추 33세에 승하하였다. 오늘날의 성동구 능동에 있는 어린이대공원인 양주땅 용마산 기슭의 유릉에 같은 달 29일 안장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53세로 승하하자 그 해 6월 11일 순종을 홍릉 왼쪽 산줄기 언덕에 장사지내면서 순명효황후의 능을 천장해 와서 합장하였다.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에는 일반 백성들에 의한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966년에는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가 1월 13일 춘추 72세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승하하여 유릉에 함께 안장하였다.

이리하여 세 사람의 유해가 한 봉분 안에 모셔진 동봉삼실의 무덤이 된 것이다.

 

순정효황후는 여걸이었다고 전해진다.

1910년 조선 왕조 마지막 어전회의를 엿듣던 순정효황후는 친일 성향의 대신들이 순종에게 한일합병을 강요하자 옥새를 자신의 치마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큰아버지인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겼고, 이후 순종과 순정효황후는 이왕과 이왕비의 신분으로 강등되었다. 순종 승하 후에는 대비의 신분으로 창덕궁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고, 한국전쟁 때 피난길에 올랐다가 잠시 환궁하지 못하기도 했으며, 1960년에 환궁, 이후 의민태자(영친왕, 영왕) 일가, 덕혜옹주와 함께 지냈다. 1966년 낙선재 구역 석복헌에서 일생을 마감했다.   

   

 

 

* 홍유릉 : 31-591-7043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 141-2 (홍유릉로 272)

 

2013.12.0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