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랑, 그 흔적들-국내/광주 전라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보물 제275호)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보물 제275호)

 

 

전남 곡성군 죽곡면 태안로 622-71, 태안사 (원달리)

대안사에 있는 탑비로, 고려시대 승려 광자대사 윤다(允多)의 탑비이다.

광자대사는 대안사를 두 번째로 크게 번성케 한 스님으로, 경문왕 4년(864)에 태어나, 8세에 출가하였다. 사방을 다니다가 동리산에서 수도를 하였고, 그 뒤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계(戒)를 받아, 다시 동리산으로 돌아와서 승려가 되었다. 혜종 2년(945)에 82세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광자’라 내리었다.

 

비는 비문이 새겨진 몸돌이 파괴되어 일부 조각만이 남아 있으며, 거북받침 위에 머릿돌만 얹혀져 있는 상태이다. 등 위로는 비를 얹기 위한 받침대가 새겨져 있는데, 옆면에 보이는 무늬가 어떤 것을 표현한 것인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머릿돌에는 네 귀퉁이마다 이무기의 머리조각이 돌출되어 있고, 앞면에는 극락조로 보이는 새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이러한 새 종류의 조각은 구례 연곡사 동 승탑(국보 제53호)나, 구례 연곡사 북 승탑(국보 제54호)에서 잘 나타나 있다.


 

머릿돌의 돋을새김한 새의 모습

 

 

거북은 목이 짧아보이기는 하지만, 머리의 표현이나 몸 앞쪽의 조각이 사실적이고 화려하게 표현되어 있다.

 

 

귀부의 모습

 

 

머릿돌의 네 귀퉁이마다 이무기의 머리조각이 돌출되어 있다.

 

 

비몸돌의 파손으로 비문은 거의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지만 다행히 『조선금석총람』에 일부 글자가 빠진 채로 그 전문이 실려있어, 광자대사가 출가하여 법을 받고 전하는 과정, 공양왕의 옆에서 불심에 대한 문답을 한 일, 고려 태조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일 등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의 글씨는 줄을 친 후 새겨 놓았는데, 전체적으로 건강한 힘이 느껴지고 은은한 기운이 감돌고 있어 통일신라에 비하여 서예가 훨씬 발전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곳곳의 여러 조각들을 통해 다양한 장식을 표현하려 했던 참신한 의도가 엿보이는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지 5년 후인 광종 1년(950)에 세운 작품이다. (문화재청)

 

 

부도밭 풍경

 

 

 

2011.12.28(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