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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강원

2010.09.11(토) 평창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

 

2010.09.11(토) 평창 오대산

 

< 월정사 >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 자장율사가 창건.

자장율사는 636년 중국 오대산으로 유학을 가고

그곳 문수사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친견.

신라에 돌아오자마자 오대산으로 들어가 정진.

이후 태백 정암사에서 입적.

이로부터 월정사는 오대산 깊은 계곡에 터를 잡게 되었단다.

 

 

< 아름다운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

국보 제48호. 높이 15.2m. 6·25전쟁 때 일어난 화재로

이 절의 건물과 함께 심하게 손상되었으나 현재 일부가 보수되었다.

고려시대가 되면 4각형 평면에서 벗어난 다각형의 다층(多層)석탑이

우리나라 북쪽지방에서 주로 유행하게 되는데,

이 탑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고려 전기 석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당시 불교문화 특유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와 조각수법이 착실하여 다각다층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또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풍경과 금동으로 만들어진 머리장식을 통해

금속공예의 수법을 살필 수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적광전과 탑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그 앞에는 공양하는 모습의 보살상이 마주보며 앉아 있다.


 

탑은 8각 모양의 2단 기단(基壇) 위에 9층 탑신(塔身)을 올린 뒤,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 모습이다.

 

 

공양하는 모습의 보살상.

이것은 모조품이고 실제 모습은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眼象)을 새겨 놓았고,

아래·위층 기단 윗부분에는 받침돌을 마련하여 윗돌을 괴어주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일반적인 석탑이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과 달리

2층 탑신부터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으며,

1층 탑신의 4면에 작은 규모의 감실(龕室:불상을 모셔두는 방)을 마련해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계단 모양의 받침을 두지 않고 간략하게 마무리하였고,

가볍게 들려있는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아 놓았다.

 

 

지붕돌 위로는 머리장식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데,

아랫부분은 돌로, 윗부분은 금동으로 만들어서 화려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원래 탑의 모습. 6.25 전 사진.. 

 

 

 

< 상원사 >

상원사는 705년(성덕왕 4)에 성덕왕이 창건했다.

효소왕(692~701 재위) 때 신문왕의 아들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왕자가

오대산에 입산하여 동쪽에 있는 만월산(滿月山)에는 일만관음보살을,

서쪽에 있는 장령산(長嶺山)에는 일만대세지보살을,

남쪽에 있는 기린산(麒麟山)에는 일만지장보살을,

북쪽에 있는 상왕산(象王山)에는 일만미륵보살을,

중앙에 있는 지로산(地盧山)에는 일만문수보살을 첨례(瞻禮)했다.

그 뒤 성덕왕이 된 효명이 다시 이 산을 방문하여 진여원(眞如院)을 창건하고,

문수보살상을 조성하여 봉안함으로써 이 절이 창건된 것이다.

그 뒤 1376년(우왕 2)에 영암이 중창했다.

1464년(세조 10) 왕이 이곳에 행차했다가 문수보살을 배알한 후

고양이 덕분에 자객으로부터 목숨을 건졌다고 하는 일화가 전하는데

이로 인해 다음해에 중창하고 전답을 하사했으며,

이것을 영산부원군 김수온(金守溫)에게 기록하도록 했다.

〈상원사중창권선문 上院寺重創勸善文〉이 남아 있다.

1469년(예종 1)에 세조의 원찰(願刹)이 되었다.

1904년에 선원(禪院)을 개설하고

1907년에 수월화상이 주석하면서 선풍을 떨치게 되었다.

현존 당우로는 선원인 청량선원(淸凉禪院), 승당인 소림초당(小林草堂),

종각인 동정각(動靜閣), 영산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

문수동자좌상에서 발견된 복장유물 23점(보물 제793호),

동종(국보 제36호) 등이 있고,

〈상원사중창권선문〉은 한문과 한글이 병기되어 있어 한글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상원사 입구 '관대걸이' 

상원사 초입에 있는데, 문수보살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월정사에 들른 세조는 상원사에 오르기 전 계곡물에 몸을 씻으려고 하는데,

신하들을 모두 물러나게 하고 때마침 지나던 동자승에게 몸을 맡겼다.

왕인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게 껄끄러웠던지

세조는 동자승에게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자 동자승은 세조에게 "문수보살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며 사라져버렸다.

그 후 세조 몸에 났던 종기는 씻은 듯이 나았다.
자장율사도 만나지 못한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는 이 이야기는

승려 못지 않은 세조의 불심을 보여준다나...

 

 

상원사

 

< 상원사 동종 >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졌다.

경주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이며,

크기는 높이 167cm, 입지름 91cm이다.

이 종의 맨 위에는 큰 머리에 굳센 발톱의 용이 고리를 이루고 있고,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연꽃과 덩굴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종 몸체의 아래 위에 있는 넓은 띠와 사각형의 유곽은 구슬 장식으로 테두리를 하고

그 안쪽에 덩굴을 새긴 다음 드문드문 1∼4구의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奏樂像)을 두었다.

네 곳의 유곽 안에는 연꽃 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그 밑으로 마주보는 2곳에 구름 위에서 무릎꿇고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飛天像)을 새겼다.

비천상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를 구슬과 연꽃 무늬로 장식하였다.

이 종은 조각 수법이 뛰어나며

종 몸체의 아래와 위의 끝부분이 안으로 좁혀지는 고풍스런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으로

한국 종의 고유한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다.

현존(現存)하는 한국종(韓國鍾)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이 종은
신라(新羅) 성덕왕(聖德王) 24년(725)에 조성(造成)되어
조선(朝鮮) 예종(睿宗) 원년(元年)(1469)에 상원사(上院寺)에 옮겨진 것으로,
한국종의 고유한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범종(梵鍾)이다.

음통(音筒)이 있는 종뉴(鍾뉴) 아래에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鍾身)이 연결된 형태인데,
이상적인 비례와 안정감 있는 구조,
풍부한 양감(量感)과 함께 세부적인 묘사수법도 매우 사실적이다.
종신에 있는 상대(上帶)·하대(下帶),
네 곳에 있는 유곽(乳廓)의 문양은 모두 당초문(唐草紋)을 바탕으로
2∼4인의 작은 비천상(飛天像)이 있는 반원권문(半圓圈紋)이 새겨졌고,
종복(鍾腹)에 비천상과 교대로 있는 당좌(撞座)는
8엽(葉)의 단판연화문(單瓣蓮華紋)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비천상은 경쾌하기 이를데 없는 모습으로
구름 위에서 천의(天衣) 자락을 흩날리며 공후와 생(笙)을 연주하고 있는데,
볼록한 두 뺨, 유연한 신체에 걸친 천의 등은
8세기 전반의 이상적(理想的) 사실풍(寫實風)의 불교조각 양식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이러한 상원사 종에 보이는 음통,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형, 상대·하대,
네 곳에 있는 유곽의 구조적인 특징은
한국종의 전형(典型)이 되어, 양식적인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이후의 모든 종에 계승된다.

국보 36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