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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서울 인천 경기

[경기 화성] 사적 제206호 융건릉(융릉과 건릉)

융릉(隆陵. 추존 장조와 헌경왕후의 능)

홍살문 앞에서 정자각 옆 뒤로 능침이 바라보인다. 대개의 왕릉은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상에 축을 이루는데, 융릉은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있다. 

건릉(健陵.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

정조와 사도세자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사도세자)를 여의고

효장세자(사도세자의 이복형)의 후사가 되어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주변 상황이 그리 녹록치 않았으나 무사히 왕위에 오른 정조~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며 먼저 아버지의 존재를 선언했다.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문을 숭상했으며

당쟁의 피해를 줄이려고 탕평책을 써서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고 했다.

정적으로 알려졌던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와의 편지 등에서

정조가 정국을 유리하게 이끌어가려 했음을 알 수 있다.

화성을 쌓고 새로운 서울을 꿈꾸며 개혁 의지를 보였으나

49세 나이에 운명을 달리함으로써 계획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정조의 묘호가 처음에는 정종(正宗)이었으나

대한제국 황제 추존 후 정조라 추존(광무 4년. 1900년).

영월의 정조 태실비에는 정종(正宗)이라 쓰여 있다.

조선 2대 정종(定宗)과는 한자가 다름.

융건릉은 사도세자와 정조의 능이다.

 

 

 

사적 제206호 융건릉(융릉과 건릉)

(출처: 문화재청 조선왕릉-화성 융릉과 건릉)
 재실: 제례에 앞서 제관들이 미리 도착해서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준비하는 곳.
평소에는 참봉 등 관리가 상주하면서 능역을 돌봄. 행랑청을 지나 안쪽으로 재실이 보인다.

 

융릉(隆陵. 추존 장조와 헌경왕후의 능)

1789년(정조 13)에 배봉산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현륭원(顯隆園)으로 이름을 바꾸고 원을 다시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라간,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비각 안에는 두 기의 표석이 있는데

1기는 조선시대에 세운 조선국 표석(조선국 사도장헌세자현륭원)이고,

1기는 대한제국시대에 세운 황제국 표석(대한 장조의황제 융릉 헌경의황후 부좌)이다.
능침은 난간석을 생략하고 병풍석만 둘렀으며,

병풍석의 면석은 인조의 장릉(長陵)의 형태를 따랐고,

인석은 연꽃형태로 조각한 것이 독특하다.

그 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특히 문석인은 복두를 쓴 일반적인 왕릉형식이 아닌 금관조복을 입고 있다.
공간 구성 상의 특이점 중 또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정자각과 능침이 이루는 축이다.

대개의 왕릉에서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상에 축을 이루는 반면

융릉은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있다.

홍살문의 오른쪽에는 원형의 연못인 곤신지(坤申池)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풍수적 논리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1762년(영조 38)에 장조(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 아래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묘의 이름은 수은묘(垂恩墓)라 하였으며,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리고 묘를 원으로 격상하여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원을 현재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1815년(순조 15)에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816년에 현륭원에 합장으로 원을 조성하였다.

그 후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년에 사도세자가 추존되자

능으로 격상되어 융릉이라 하였다.

 

(출처: 조선왕릉 홈페이지)

사도세자(추존 장조)와 헤경궁홍씨(헌경왕후)의 묘. 홍살문 들어서기 전에 왼쪽으로 곤신지, 홍살문 안쪽으로 수라간, 정자각, 능, 비각이 보인다.
융릉은 다른 왕릉들과 달리 정자각과 능이 일직선 상에 있지 않다.

오른쪽은 현륭원비, 왼쪽은 융릉비(황제 추존 후 비)
조선국 사도장헌세자 현륭원(朝鮮國 思悼莊獻世子 顯隆園) 비 (밖에서 바라보아 오른쪽 비) 
대한 장조의황제 융릉 헌경의황후 부좌(大韓 莊祖懿皇帝 隆陵 獻敬懿皇后 附左)- 밖에서 바라보아 왼쪽 비. 황제 추존 후 비
융릉에서 건릉으로 가는 숲길에서...
잔디를 깔았고 긴의자도 놓여 있고... 공원화 조성 중~
코로나로 일부 구간은 통제 중~~

 

 

건릉(健陵.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

조선 22대 정조선황제와 효의선황후 김씨의 능이다.

건릉은 같은 봉분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의 형식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라간,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은 융릉과 비슷하지만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그 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을 배치하였다.

 

1800년(정조 24)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장조의 현륭원(융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순조가 왕위에 오른 후 건릉 불길론이 있었고,

1821년(순조 21)에 효의선황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건릉 천장이 결정되었다.

이후 현륭원 서쪽 언덕으로 능자리가 결정되면서 합장릉의 형태로 능을 조성하였다.

 

(출처: 조선왕릉 홈페이지)

조선 제22대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
정조가 황제로 추존된 후에 원비를 갈아서 다시 세운 비
건릉비. 대한 정조선황제 건릉 효의선황후 부좌 (大韓 正祖宣皇帝 健陵 孝懿宣皇后 附左) - 정조와 정조의 왼쪽에 효의선황후가 같이 묻혀 있음 
정조의 묘호가 처음에는 정종이었으나 황제 추존 후 정조. 영월의 정조 태실비에는 정종(正宗)이라 쓰여 있다.
건릉 정자각과 능

 

융건릉은 사실 꽤 여러 번 간 곳이지만

언제 가도 산책하기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적으로 많은 의미가 내포된 곳이어서 

생각할 게 많은 곳이기도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저 잠시 잊혀진 역사를 기억할 뿐~

역사는 흐르기에 산책에 더 무게를 두게 되네...

(2020.12.26.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