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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서울 인천 경기

[서울 종로] 탑골공원 - 원각사지10층석탑과 원각사비

[서울 종로] 탑골공원 - 원각사지10층석탑과 원각사비

 

2013.04.13(토)

 

북촌나들이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잠시 탑골공원에 들렀다.

예전에도 몇 번 가 본 적이 있지만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

일행과 이동 중에 슬쩍 들어갔기에 세세히 살펴보지는 못하고,

중요한 문화재만 얼른 보고 나왔다.

 

 

사적 제354호 서울 탑골공원 (서울 塔골公園) 

 

조선시대 원각사터에 세운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

오랫동안 파고다 공원이라고 불리었다.
원각사는 고려 때 흥복사라 불리었고,

조선 전기에 절을 넓히면서 원각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불교를 억누르는 정책으로 인해 연산군과 중종 때 절이 폐사되었다.

그 후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로 이곳에 서양식 공원을 세웠으나,

그 이유와 시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고 한다.
공원 안에는 원각사지 10층석탑(국보 제2호)과 원각사비(보물 제3호)가 있다.

또한 이곳은 1919년 3월 1일 처음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의 출발지이다.

독립운동 관련 자료로는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팔각정,

독립만세 부조판, 손병희 선생의 동상 등이 있다.
* 위치: 서울 종로구 종로 99 (종로2가)

 

 

국보 제2호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 (서울 圓覺寺址 十層石塔)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웠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聯芳院)’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국86)과 매우 비슷하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발췌)

 

산성비와 비둘기 배설물 등에 의한 대리석의 부식을 막기 위해 이렇게 유리 보호각을 씌웠다.

얼마나 답답할까~~~

 

예전에 가두기 전의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경복궁에 있었던 경천사지 십층석탑을 보며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산성비와 풍화작용 등으로 이제는 보호각에 갇힌 상황이 되었다.

보는 사람도 갇힌 석탑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

 

가두기 전의 모습.

 

 

 

보물 제3호 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서울 圓覺寺址 大圓覺寺碑)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건립되었다.

원각사는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조계종의 본절로 세웠다.

조계종이 없어지자 관아로 사용되다가

세조가 간경도감에서『원각경 (圓覺經)』을 번역하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사리를 나누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다시 원각사를 짓고 10층 사리탑을 세웠다.
비는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았고,
비몸돌 위로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드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었으며,

조각 아래의 가운데에는 ‘대원각사지비 (大圓覺寺之碑)’라는 비의 이름이 강희맹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앞면의 비문은 김수온, 성임, 뒷면의 추기는 서거정, 정난종이 각각 짓고 썼다.

(문화재청 자료 발췌)

 

원각사비.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이다.

 

 

 

 

공원 주변에서 본 꽃이 아름다워 찍었다.

 

2013.04.13(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