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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서울 인천 경기

[서울 종로] 창덕궁 3 - 낙선재 일원

[서울 종로] 창덕궁 3 - 낙선재 일원

 

 

창덕궁과 창경궁 경계에 위치한 낙선재...

궁궐 안에 사대부 주택 형식으로 지은 건물로는

이곳 낙선재와 창덕궁의 후원 구역에 있는 연경당 뿐이다.

낙선재 구역에는 맨 왼쪽에 낙선재가 크게 자리 잡고

그 오른쪽으로 석복헌과 수강재가 연이어져 있다.

이 건물들 뒤편에는 화초, 석물, 꽃담 굴뚝 등으로 가꾸어진 아름다운 화계와

그 위의 꽃담 너머로는 상량정, 한정당, 취운정이 위치해 있다.

 

 

보물 제1764호 창덕궁 낙선재 (昌德宮 樂善齋)

 

낙선재는 헌종 13년(1847)에 왕이 왕비와 대왕대비를 위해 마련하여

조선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고 자신의 개혁의지를 실천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했단다.

1884년 갑신정변 직후 고종의 집무소로 사용하고

조선왕조 마지막 왕으로 추존된 영친왕 이은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부터 1989년까지는 이방자여사가 기거한 곳이다.

 

낙선재 구역의 맨 왼쪽에 자리잡은 낙선재.

비교적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낙선재는 조선왕가의 실제 침전으로 사용된 건물로

궁궐 침전 건축과는 달리 단청을 하지 않고 사대부 주택 형식으로 건축되었다.

그러나 궁궐 침전 형식이 응용되면서 다른 곳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문양의 장식이 쓰였다.

 

낙선재 뒷쪽 담 뒤로 보이는 육각 건축물이 상량정.

볼 때마다 아름답게 보이던 그 모습...

조선시대 궁궐의 위치, 명칭, 연혁 등을 기록한 <궁궐지>에는 ‘육우정 평원루’라고 되어 있다는 누각이다.

 

 

낙선재에서 석복헌으로 가는 통로 주변

 

 

 

석복헌

 

조선의 24대 왕 헌종이 아끼는 경빈 김씨를 위해 지은 건물로,

석복헌은 복을 내리는 집이라는 뜻.

 

헌종비 효헌왕후 김씨가 세상을 뜬 후 헌종의 뜻과 달리 명헌왕후 홍씨가 간택되었다.

3년 뒤 명헌왕후에게서 출산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새로운 후궁을 들였는데

바로 3년 전 삼간택 때 마음에 두었던 경빈 김씨였다고... 

1993년 석복헌 복원 공사 때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경빈 김씨가 아들 낳기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

또한 수강재에서 석복헌으로 통하는 일각문 주변과 화계 등에 다남(多男)을 뜻하는 포도 문양이 많이 장식되어 있다.

이처럼 헌종은 후손을 보려고 여러 노력을 했으나 경빈이 들어온 지 2년 뒤에 자식 없이 승하했다고 하니

헌종의 순애보는 헛된 노력이 되고 말았다는 안타까운 사연이 깃든 곳...



 

 

수강재 

 

1785년 정조 때 지은 건물이다.

헌종 14년(1848)에 헌종이 할머니였던 순원왕후의 거처로 중수하였고,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가 지내다 돌아가신(1989년) 곳이다.

참 희한하게도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는 같은 해 같은 달(1989년 4월)에 세상을 떠났다.

 

덕혜옹주가 마지막을 보낸 수강재.

이곳 수강재도 상당 부분이 변형되어 있다고 한다. 

 

덕혜옹주는 고종황제가 60세에 얻은 막내딸로 황실의 총애를 받았지만

12살에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고 정략결혼을 하는 등 불행한 삶을 살았다.

대한제국의 종식에 따른 신분의 몰락과 일본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딸의 자살 등으로 인해

정신병원 생활을 할 정도로 일본에서의 삶도 비참했다고 한다.

1962년 귀국했을 때에도 정신이 온전치 못한 쇠약한 모습이었다.

 

2013.04.13(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