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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서울 인천 경기

[경기 여주] 우암 송시열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강한사(대로사)

[경기 여주] 우암 송시열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강한사(江漢祠=대로사大老)

 

 

2013.11.24(일)

 

강한 미세먼지와 짙은 안개는 여전하다.

종일 뿌연 기운이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어 숨쉬기가 찝찝한 날이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0호인 강한사(江漢祠)

우암 송시열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으로

정조 9년인 1785년에 정조가 김양행에게 사당을 짓게 하고
송시열에 대한 존칭인 ‘대로(大老)’의 명칭을 붙여

사당 이름을 대로사라고 하였단다.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철거할 때

송시열을 모시던 44개의 서원이 모두 헐렸으나

이곳 대로사만이 강한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남게 되었다고 한다.


 

대로사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강한사(江漢祠)로 이름만 바뀐 채 화를 면하였다. 

대부분의 서원이나 사당이 남향을 하고 있으나 대로사 사당은 북벌계획을 추진하던 효종대왕릉을 바라보며 서향을 하고 있다.


 

 

 

대로사비 

대로사 보호비각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4호 대로사비

 

조선 후기의 대유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의 제사를 모시는 대로사(大老祠)의 내력을 적은 비로, ‘대로’선생에 대한 존칭이다.

송시열 선생은 인조 11년(1633) 사마시에 합격하여 경릉참봉을 지냈으며, 봉림대군(후의 효종)의 스승이기도 했다. 선생은 이곳 여주에 머무를 때마다 효종의 능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후배들에게 북벌의 대의를 주장했었다 한다. 정조가 영릉을 행차하다가 이 말을 전해 듣고 김양행에게 대로사를 짓도록 명하였다. 이는 노론과의 관계가 좋지 못했던 정조가 노론이 받드는 송시열을 높여줌으로써 노론의 불만을 달래려 한 정치적 의도를 말해준다. 대로사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강한사(江漢祠)로 이름만 바뀐 채 화를 면하였다.

비는 네모난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앞면에 비의 명칭을 새기고, 나머지 면에는 비문을 새겼다. 정조 11년(1787)에 세운 비로, 정조가 친히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

 

(출처 : 문화재청)

 

 

 

 

 

 

 

앞면에 비의 명칭을 새기고, 나머지 면에는 비문을 새겼다.

정조 11년(1787)에 세운 비로, 정조가 친히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고 한다.

 

 

강한사(江漢祠=대로사大老)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0호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정치가인 우암 송시열의 뜻을 기리고 제사지내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송시열은 일생을 주자학 연구에 몰두한 대선비로 생원시에 합격하여 영의정까지 지냈다.

정조 9년(1785)에 왕이 김양행에게 사당을 짓게 하고 송시열에 대한 존칭인 ‘대로(大老)’의 명칭을 붙여 사당 이름을 대로사라고 하였다. 그 뒤 고종 10년(1873) 10월에 강한사라 개칭하였다.

건물은 강당과 사묘, 관리인이 거주하는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비교적 간단한 규모이나 배치가 특이하다. 출입문인 장인문이 서쪽으로 나있으며 사묘 또한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것은 영릉(효종의 릉)을 바라보기 위한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철거할 때 송시열을 모시던 44개의 서원이 모두 헐렸으나 오직 대로사만이 강한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남게 되었다.

(출처 : 문화재청)

 

강한사 외문과 추양재

 

 

대로사

 

대로사 내삼문

 

대로사  

 

 

대로서원

대로서원. 강당으로 쓰인 건물이다.

 

  

대로사 강한루.

안쪽에 강한사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강한사에서 본 대로비각

 

 

   

 

강한사(대로사)

 

추양재

 

추양재는 대로사의 재실로 사무실로 쓰이고 있는 건물이다.

 

 

비석군.

대로사기적비, 대로사추양재기실비 등... 

 

* 주소 : 경기 여주시 하동 200-1

 

2013.11.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