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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그 흔적들-국내/서울 인천 경기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龍仁 瑞鳳寺址 玄悟國師塔碑)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龍仁 瑞鳳寺址 玄悟國師塔碑)

 

오전에 황사비가 내려 집안 일이나 하며 지냈는데,

점심 때쯤 날이 슬슬 걷히는게 아닌가~~

얼씨구나 싶어 가까운 용인으로 잠깐 나들이...

 

서봉사지 가는 길..

입구에 등산객을 위한 시설물이 보인다.

화장실은 이제 설치한 듯~ 아직 테이프로 둘러쳐져 있다.

아직은 정비되지 않은 모습...

 

광교산 산길... 

 

졸졸~ 개울물이 정겹게 흐르고...

 

나뭇가지엔 새 생명이... 

 

축대 사이로 비각이 보인다.

 

작고 얕은 계단을 조금 오르면 보이는 비각 

 

 

비각 안에 점잖게 서 있는 비석의 모습

 

희미하지만 주인공을 알 수 있는 글자가 보인다.

 

 

 

 

 

 

 

 

 

축대. 이 위로 절이 있었던 듯... 

 

축대 위 절터에서 내려다본 비각 모습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보물 제9호(1963.01.21 지정)

경기 용인시 수지읍 신봉리 산110

 

서봉사의 창건에 대한 기록은 없고 절터의 크기로 보아 아주 큰 규모의 절로 추정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절에서 떠내려오는 쌀뜨물이 10리나 흘러내려와 왜적이 물을 따라 올라가서 절을 불태웠다고 한다. 이곳은 탑비의 비각을 세우는 공사를 하던 도중에 기록이 남아있는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서봉사의 옛터임이 밝혀졌다.

명종 15년(1185)에 세워진 이 탑비는 현오국사(玄悟國師)의 행적을 후대에 알리고자 만들어졌다. 보통 부도와 함께 건립되는데 절터에 부도의 흔적은 없고 이 비석만 남아 있다. 화강암의 비받침위에 점판암으로 만들어진 비몸돌이 놓여있는 단촐한 모습이다.

비받침부분의 윗면은 4변을 비스듬히 잘라내었고, 비문이 새겨지는 비몸에도 윗부분의 양 귀끝을 사선으로 접듯이 잘라서 마무리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현오국사는 15세에 불일사(佛日寺)에서 승려가 된 후 부석사(浮石寺)의 주지를 거쳐 명종 8년(1178) 53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이 크게 슬퍼하여 국사(國師)로 삼고 시호를 ‘현오(玄悟)’라 한 뒤 동림산 기슭에서 화장하였다. (문화재청 자료)

2011.03.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