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여주] 북벌의 꿈이 함께 묻힌 곳, 여주 효종 영릉(寧陵)
[경기 여주] 북벌의 꿈이 함께 묻힌 곳, 여주 효종 영릉(寧陵)
2013.11.24(일)
사적 제195호로 지정된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驪州 英陵과 寧陵)...
세종 영릉(英陵)을 본 후 오른쪽 언덕의 효종 영릉(寧陵)을 돌아보았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봉림대군)이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을 보냈다.
형인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세자에 봉해졌고 왕위를 이어받았다.
이후 북벌계획을 추진하여 군제를 개혁하고 군비를 강화했으며
임진, 병자 양란 이후 어려워진 경제 재건에도 힘쓴 왕이다.
여주 세종 영릉과 이웃한 곳에 위치한 효종 영릉.
왼쪽 위로 보이는 능이 효종의 능이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것이 인선왕후릉.
효종의 능
효종 영릉(寧陵)
영릉(寧陵)은 17대 효종(재위 1649∼1659)과 부인 인선왕후(1618∼1674)의 무덤이다.
처음엔 건원릉의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현종 14년(1673)에 여주 영릉 동쪽으로 옮겼다. 영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동원상하릉으로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형태이고, 경종의 무덤인 의릉이 이런 형태를 하고 있다.
조선왕조 왕의 무덤배치에 하나의 전환기가 된 형태로 무덤에는 병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고, 돌 난간의 기둥 사이를 받치는 돌에 문자를 새겼다. 즉 세조의 유언에 따라 병석을 세우지 않는 전통이 선릉 때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석을 설치하면서 다시 시작되었지만, 영릉에서 다시 사라졌다. 무덤 앞에는 상석·문인석·망주석 등의 석물이 있으며,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매표소와 재실을 지나 소나무 숲길을 조금 걸으니 홍살문이 보인다.
신성한 구역임을 알리는 홍살문
왼쪽부터 수라간, 정자각, 능, 영릉비, 수복방...
오른쪽 아래는 판위(배위).
홍살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위치
참도를 통하여...
효종 영릉에는 금천교가 참도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홍살문 앞쪽에 위치하는데, 좀 특별한 경우란다.
정자각과 영릉비
정자각의 동쪽 계단. 신이 오르는 계단 양옆에 두 개의 계단을 두었다.
정자각 내 제단
정자각 뒷문 사이로 영릉이 보인다.
정자각에서 바라본 모습.
수복방, 참도, 금천교, 홍살문이 보인다.
예감
정자각 뒤 왼쪽 언덕 아래에 있는 예감
예감. 제사가 끝난 뒤 철상하면서 축문을 여기에 태워 묻었단다.
인선왕후릉과 영릉비각
영릉비각
영릉비
영릉비.
朝鮮國 孝宗大王寧陵(조선국 효종대왕영릉)이라고 쓰여 있다.
영릉비 받침대.
약간 오른쪽 아래 언덕에 위치한 인선왕후릉.
정자각과 영릉비각
수라간과 정자각
수복방, 수라간, 정자각
영릉비각과 정자각
효종릉(좌)과 인선왕후릉(우)
효종릉(좌)과 인선왕후릉(우)
인선왕후릉
인선왕후릉.
봉분에 난간석을 두르고 주위에 석양, 석호로 호위하였다.
앞쪽에는 장명등, 망주석, 혼유석, 문무인석, 석마를 배치하였다.
효종의 능
인선왕후의 능 위로 효종의 능이 있다.
동원상하릉의 형태를 보인다.
위에 위치한 효종릉에는 곡장을 둘렀다.
석물의 배치는 인선왕후와 같다.
석마, 무인석,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 혼유석 등이 배치되었다.
석마, 무인석, 문인석, 망주석, 석양, 석호...
장명등, 혼유석...
혼유석 아래에 받치는 고와 봉분 난간석에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효종의 능 봉분에도 난간석을 둘렀고, 개별릉이므로 혼유석은 하나만 두었다.
혼유석 앞에는 장명등이 우람하게 서 있다.
봉분 뒤로 곡장이 보인다.
무덤을 지키는 석마, 무인석, 문인석, 망주석, 석양...
무덤 주위로는 소나무숲이 우거져 있다.
더 위에 위치한 효종의 능
약간 아래에 위치한 인선왕후의 능
정자각과 영릉비각
수라간, 정자각, 영릉비각
정자각, 영릉, 영릉비각, 수복방
동원상하릉의 형태를 보이는 효종 영릉(寧陵)
판위 앞에서 본 주변 풍경.
여전히 미세먼지와 안개로 시야는 흐리다.
2013.11.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