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 창덕궁 1 - 내.외전 구역
[서울 종로] 창덕궁 1 - 내․외전 구역
2013.04.13(토)
창덕궁 (昌德宮)
사적 제122호.
태종 5년(1405)에 세워짐.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창덕궁은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녕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 중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광해군 때 지은 것이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창덕궁(비원포함) → 창덕궁)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문화재청 자료)
보물 제383호 창덕궁 돈화문(昌德宮 敦化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의 대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1412년 5월에 세워졌으며, 1609년(광해원년)에 중수했다고 한다.
돈화문에는 원래 현판이 없다가 성종 때 서거정에게 분부하여 이름을 지어서 걸게 하였단다.
중앙은 어문으로 왕의 전용 문.
좌우문은 당상관 이상 높은 관료가 드나들던 문이지만,
3사(三司: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언관은 관직은 낮아도 좌우 문으로 드나들게 했다고 한다.
보물 제1762호 창덕궁 금천교 (昌德宮 錦川橋)
창덕궁의 금천교는 창덕궁의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사이를 지나가는 명당수 위에 놓여 있다.
창덕궁이 창건되고 6년 뒤인 태종 11년(1411)3월 진선문 밖 어구에 설치되었다.
현존하는 궁궐 안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
돈화문을 들어서면 바로 금천과 금천교를 만나게 된다.
금천교
금천교 아래 명당수가 흐르는 곳... 금천
국보 제225호 창덕궁 인정전 (昌德宮 仁政殿)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이다.
왕의 즉위식을 비롯하여 결혼식, 세자책봉식 그리고 문무백관의 하례식 등
공식적인 국가 행사 때의 중요한 건물이다.
광해군 때 중건된 이후 순조 3년(1803)에 일어난 화재로 인한 재건,
그리고 철종 8년(1857년)에 보수공사 이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인정전
인정전 앞 품계석과 차양천막용 고리
인정전의 내부.
정면에 왕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곡병이, 곡병 뒤에는 일월오악도(일월오봉도)라는 병풍이 있다.
병풍에는 음양을 뜻하는 해와 달이 있다(왕과 왕비를 상징).
그 아래 다섯 개의 산봉우리는 우리나라의 동, 서, 남, 북, 중앙의 다섯 산을 가리킨다(국토를 의미).
인정전에는 유리창, 전구, 커튼 등 서양 장신구가 설치되어 있는데,
구한말 외국과의 수교 후 다양한 외래 문물이 들어온 것...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에 인정전의 실내바닥이 전돌에서 마루로 바뀌고,
전구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인정전 앞 부견주. 부간주 또는 부전주라고도 불린단다.
액을 때우기 위해 팥죽을 쑬 때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국어사전에는 '예전에 궁중에서 독 대신 무쇠로 만들어 물을 저장하는 그릇을 이르던 말'이라고 씌어 있다.
화마 방지에 썼다는 주둥이가 넓은 드므와는 달리 부견주는 주둥이 부근이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보물 제814호 창덕궁 선정전 (昌德宮 宣政殿)
‘선정(宣政)’이란 ’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친다‘는 뜻이며,
선정전(宣政殿)은 임금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이다.
다른 전각들과 달리 지붕도 청색 유리기와로 덮은 청기와인데
기법은 중국에서 도입한 것으로 ‘회회청(回回靑)’이라는 비싼 안료를 외국에서 수입하여 청기와를 구웠다고 하며,
선정전은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집이다.
선정전
선정전 내부.
이곳 역시 일월오악도 병풍이 있고, 어좌의 위 천장에는 봉황그림이 있다.
보이는 책상은 사관이 사초를 적던 곳...
어좌의 위 천장의 봉황그림(문화재청 사진 자료)
선정전을 나와 뒤뜰쪽으로 이동 중에 본 선정전의 모습
남녘에 비하면 한참 늦은 매화
선정전 뒤의 뜰.
한 무리의 외국인팀 모습이 보였다.
보물 제815호 창덕궁 희정당 (昌德宮 熙政堂)
희정당은 본래 침전으로 사용하다가, 조선 후기부터 임금님의 집무실로 사용한 곳.
지금 있는 건물은 1917년에 불에 탄 것을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다 1920년에 지은 것.
한식건물에 서양식 실내장식을 하고있다.
응접실에는 김규진의 금강산총석정절경도, 금강산 만물초승경도의 벽화가 걸려있다.
조선 후기부터 선정전을 대신하여 임금님의 집무실로 사용하였다.
(문화재청 사진으로 대신)
보물 제816호 창덕궁 대조전 (昌德宮 大造殿)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
조선 태종 5년(1405)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를 비롯하여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불이 나서 다시 지었다.
1917년 또 화재를 당하여 불에 탄 것을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고 그 부재로 이곳에 옮겨 지었다.
왕이 곧 용이니 용마루가 없는 건물이다.
이 건물에서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을 비롯하여 인조·효종이 죽었고,
순조의 세자(효명세자)로 뒤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난 곳이란다.
단 위 왼쪽이 드므(화재방지용 물그릇=방화수통), 오른쪽이 부견주(무쇠로 만든 물용기).
단 아래는 앙부일구(해시계)
흥복헌.
대조전에 딸린 건물로 일제에 국권을 박탈당하는 역사의 아픔이 서린 곳이다.
1910년 이곳에서 어전회의가 개최되었고, 그것이 조선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되었다.
이후 일제는 우리의 국권을 피탈하였고 경술국치를 맞게 되었다.
뒷뜰
* 창덕궁 주소: 서울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013.04.13(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