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 그 흔적들-국내/강원

강릉 임영관지와 임영관 삼문(강릉 객사 정문)

낭만방랑자 2011. 12. 24. 18:49

 강릉 임영관 삼문(江陵 臨瀛館 三門) - 강릉 객사 정문

 

국보 제51호

강원 강릉시 임영로131번길 6 (용강동) 

강릉객사문이라 불리던 것으로 객사의 다른 건물들은 없이진 상태며

객사문만 남아 옛 이야기를 전한다.

 

고려시대에 지은 강릉 객사의 정문으로, 현재 객사 건물은 없어지고 이 문만 남아 있다. 객사란 고려와 조선시대 때 각 고을에 두었던 지방관아의 하나로 왕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망궐례를 행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나 사신들이 묵기도 하였다.

이 객사는 고려 태조 19년(936)에 총 83칸의 건물을 짓고 임영관이라 하였는데, 문루에 걸려 있는 ‘임영관’이란 현판은 공민왕이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고, 일제시대에는 학교 건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학교가 헐린 뒤 1967년에 강릉 경찰서가 들어서게 되고 현재는 마당에 객사문만 남아 있다. 남산의 오성정·금산의 월화정·경포의 방해정은 객사의 일부를 옮겨 지은 것이다.

문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앞면 3칸에는 커다란 널판문을 달았으며, 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형태이다.
(문화재청)

 

임영관 삼문

 

국보 제51호이다.

 

앞쪽으로 차도가 있어 조심스럽다.

 

 

 

 

 

 

배흘림기둥. 뒤로 보이는 담쪽에 집경전(이성계 영정 모심)이 있었단다.

 


〈임영지 臨瀛誌〉에 의하면 강릉 객사는 936년(고려 태조 19) 본부객사로 지정되어 임영관(臨瀛館)의 창건을 비롯해 전대청(殿大廳)·중대청(中大廳)·동대청(東大廳)·낭대청(廊大廳)·서헌(西軒)·월랑(月廊)·삼문(三門) 등 모두 83칸 정도의 건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366년(공민왕 15) '임영관'(臨瀛館)이라는 판액(板額)을 공민왕이 친필로 썼다고 하는데 현재 객사문 앞에 걸려 있는 현판(懸板)이라고 전한다. 위에 기록된 일부 전각(殿閣)들은 여러 번 중수를 거치며 보존되어오다가 1929년 강릉공립보통학교 설립으로 인해 헐리고 오늘날 객사문만이 남아 있다.

객사문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집 3문(三門)으로서 남향해 있으며 주심포(柱心包) 형식이다. 기단(基壇)은 앞면과 옆면만 단(段)을 두어 쌓았는데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 보수(補修)된 것이고, 초석(礎石)은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은 화강석으로서 비교적 둥근 모양이다. 그 위에 기둥을 세웠는데 전·후 면의 바깥기둥은 배흘림의 원기둥을, 판문(板門)이 달린 건물 중앙부의 기둥은 민흘림의 4각기둥을 세웠다. 그 옆으로 판문이 달리는 곳에 각각 신방목(信枋木)과 문지방을 받쳐주는 막이돌을 놓고, 그 위에 문을 달기 위한 문선과 판문 등이 있다. 기둥 간격에 사용된 척도(尺度)는 송대(宋代)의 영조척(營造尺)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원기둥의 배흘림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목조건축물 중 가장 뚜렷한 것으로 기둥 중앙부가 가장 굵고 기둥 상부가 가장 가늘어 약 4치[寸] 이상의 차이를 보인다. 대들보는 그 단면이 고려시대의 다른 건물과 같이 뚜렷하게 밑이 좁고 위가 넓은 항아리 입면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공포(栱包)는 헛첨차가 있는 주심포 형식이며, 주두(柱頭)와 소로[小累]의 굽에 곡(曲)을 두고 굽 밑에는 굽받침을 두어 전반적으로 첨차(檐遮)의 변형으로 나타난 쇠서[牛舌]의 초기적인 형태를 보인다. 도리(道里) 밑에는 투각(透刻)된 화반(花盤)과 포대공(包臺工)이 있고 지붕은 맞배지붕에 장연(長椽)만 사용한 홑처마집으로서 고려시대 건축의 특징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다음백과사전)

 

 

 

 

강릉 임영관 (江陵 臨瀛館)

 

사적 제388호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건물터이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고려 태조 19년(936)에 세워져, 83칸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객사문(국보 제51호)만 남아 있다. 객사문은 고려시대 건축물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몇 안되는 건물 가운데 하나로, 공민왕이 쓴 ‘임영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1993년에 강릉 시청 건물을 지을 계획으로 실시한 발굴 조사한 결과, 고려·조선에 이르기까지 관아 성격의 건물터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는 자리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임영지』의 기록을 통해 이 유적의 중요성과 옛 강릉부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문화재청)

임영관 중대청. 뒤로 서헌, 전대청, 동대청

 

 

임영관 전대청(가운데)과 동대청(오른쪽), 서헌(왼쪽)

 

 

강릉 임영관

 

 

집경전터. 임란 직후 경주에 있던 태조 이성계 영정을 옮겨와 모셨던 곳으로, 1631년 3월에 화재로 소실됨. 

2011.01.30(일)